[文의 사람 자기소개서] 임종석, 파란만장 20대·자기성찰 40대

[레이더P] 대통령비서실장…옥중편지로 결혼, 최연소 원내 입성

최초입력 2017-05-24 15:33:31
최종수정 2017-05-25 17: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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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면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을 봐야 한다."

레이더P는 문재인 정부 초대 청와대 참모와 내각 구성원 등이 남긴 발언, 저서, 칼럼, 블로그 글, 인터뷰 등을 종합해 그들이 살아온 여정을 '가상 자기소개서' 형태로 꾸몄다. 그 인물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사건과 인연 등 결정적 순간들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첫번째 순서는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51)이다.



He is...

△1966년 전남 장흥 출생 △용문고 △한양대 무기재료공학과 △한양대 총학생회장 △서총련 2기 의장 △전대협 3기 의장 △제16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17대 국회의원 (서울 성동을) △열린우리당 대변인 △통합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박원순 후보 캠프 총괄팀장 △서울시 정무부시장 △더불어민주당 19대 문재인 대통령후보 비서실장 △청와대 비서실장



◆ 20대 시절

방북 프로젝트 지휘

저는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입니다. 한양대에 입학 후 1학년 당시 '소리개벽'이라는 민중가요 노래동아리에 가입했습니다.
한양대 총학생회장에 이어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89년 6월 당시 한국외대 학생인 임수경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평양 축전' 방북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습니다. 임수경 전 의원은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에 간 것입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임수경의 평양 축전 참가를 허락하지 않았지만, 제가 의장으로 있던 전대협은 제3국을 통해 임수경을 파견했습니다.

축제에 참석한 이후 임 전 의원은 축전에 참가하고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당시 축전 참여를 통해 저는 조선대 이철규 씨 사망사건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와 전대협의 투쟁의 목적은 당시 정권의 5공비리를 척결하고 조국의 통일방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출귀몰 '임길동'

학생 운동 당시 현상지명 수배자 명단에 오른 사진. 훗날 그는 당시 여장을 하고 다닌적은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 사진=임종석 비서실장 블로그]이미지 확대
▲ 학생 운동 당시 현상지명 수배자 명단에 오른 사진. 훗날 그는 당시 여장을 하고 다닌적은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 사진=임종석 비서실장 블로그]
이 일로 지명수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연인원 12만명의 경찰이 체포망을 치고 2계급 특진과 1000만원 현상금을 내걸면서까지 저를 체포하기 위해 열을 올렸습니다. 1988년 당시 서울 송파에 있었던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가 3600만원 수준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돈인 셈입니다.

지명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 경찰 추적을 교묘하게 따돌리며 10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기자회견만 10차례 했고, 전국 대학가 집회에 꾸준히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임길동'이라는 별명이 제게 붙기도 했습니다. 항간에서는 "당시 임종석 사진을 출력해서 코팅한 책받침이 기성제품으로 생산되어 팔렸다", "여학생들이 수배 전단은 물론 (임 실장이 나온) 전대협 출범식 포스터를 떼어갔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저의 수배 전단은 지난 2015년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SNS를 통해 "제가 응팔(응답하라 1988)에 나온 거 아시나요. 덕선이가 노을이 보호하려 싸우다가 파출소에 간 장면입니다. 저 웃다가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라며 소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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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6개월간 복역

결국 경찰에 의해 체포된 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고 3년 6개월간 복역했고, 임수경 전 의원도 3년5개월 동안 복역했습니다. 실형을 받아 복역을 하면서 병역은 면제됐습니다. 이 사건의 수사를 당시 공안 검사였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맡았던 것이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징역 5년을 선고 받을 때 한 시간이 넘는 최후진술을 하면서 대항했고 그러면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물 여덟살, 3년 반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원주교도소 문을 나설 때 '이제 객관적으로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가슴 속에 박아 넣었습니다.

전대협 의장으로 활동하던 임 비서실장(가운데)이 충남대학교 학생회관에서 집회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임종석 비서실장 블로그]이미지 확대
▲ 전대협 의장으로 활동하던 임 비서실장(가운데)이 충남대학교 학생회관에서 집회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임종석 비서실장 블로그]


감옥에서 싹튼 사랑

아내(김소희)와의 인연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1992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원주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저에게 한장의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전대협 출신인 아내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월간 환경운동 기자였던 아내는 "전대협에 있을 때의 나 자신과 사회로 진출한 뒤의 나 자신을 돌아보니 고민을 하게 됩니다. 고민을 편지로 보내도 될까요"라고 적어 왔습니다.

이후 한달에 한두번 주고받던 편지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오갈 정도로 빈번해졌습니다. 그렇게 3년 6개월이 지난 후 출소를 했는데 아내로부터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당시 다소 섭섭한 마음이 들었는데, 조금 지나 연락이 왔습니다. 1993년 제가 출옥한 이후 비로소 처음으로 만나게 됐습니다. 이후 1996년 수덕사에서 내려오던 중 저는 아내에게 "결혼하자"고 했고 그해 3월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내는 이후에도 저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했습니다. 16대 선거 때는 아내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2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후보자들의 부인은 저녁 때쯤 귀가 했지만 아내는 밤에는 호프집, 소주집을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나중에 남편은 귀농하고 저는 시골에서 어린이 도서관을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한 적도 있습니다.



◆ 30대 시절

최연소 원내 입성

출소 이후에는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1995년 5월부터 1997년5월까지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 1999~2000년까지 푸른정치2000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던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 피 수혈론'에 따라 발탁되어 제도권 정치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현재 국회의원인 이인영·우상호 의원과 함께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인 중앙정치무대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제도권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2000년 치러진 16대 총선 당시 저는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해 한나라당 4선 의원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국회에 입성하게 됐습니다. 만 34세로 최연소 원내 입성이었습니다.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청년위원장도 맡았고 2002년에는 제16대 대통령선거 때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과의 인연

2002년 대선 저는 노무현 당시 후보와 6개월을 함께 생활했습니다. 새벽에 헤어져 새벽에 다시 만나는 강행군이었습니다. 11월 초,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제안에 대한 토론이 새벽까지 이어졌습니다. 새벽 2시경까지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시던 노 전 대통령은 특유의 말투로 "저한테 맡겨 주시죠"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단일화를 앞두고 주어진 10여일이 흐른 후 대전에서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가는 버스 안은 패배에 대한 두려움으로 적막했습니다. 후보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지 많은 이들이 동행하지 않은 버스 안에는 고작 10여명만이 있었습니다. 긴 적막을 깬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임 의원 담배 있어요?"라고 말하고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들고 맨 뒷자리로 가서는 조그만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시더니,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모두가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모두가 울고 말았습니다. 그날의 눈물을 잊지 못합니다. 노무현 후보가 노래에 담고 싶었던 좋은 정치의 열망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상 받는 재선 의원

참여정부 출범 뒤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바꿔 원내부대표를 지낸 이후 17대 국회에 입성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 통합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등을 지냈습니다. 의원 시절에는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만 6년을 활동하며 외교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2006년 8월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17대 국회의원당시 2007년 3월 김근태, 송영길 의원 등 여야 50명의 서명을 받아 '개성공업지구의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하는 등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력을 인정해 주신 것인지 2005년 최고 의정활동 의원, 2005~2006년 NGO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02년부터 5년 연속 백봉신사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 40대 시절

낙선 후 얻은 것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이라는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도 많은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 딸 동아와의 우정은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정치를 시작한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늦은 시간 귀가해 보니 초등학교 1학년 동아가 울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우리 아빠는 의사다'하고 자랑을 하니까 동아는 '우리 아빠는 국회의원이다'하며 맞섰답니다. 처음엔 주변 친구들이 '와 동아 아빠가 더 높다' 고 해서 으쓱했답니다.

그런데 다음날 친구가 와서는 '우리 아빠가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도둑놈이래' 하며 큰 소리로 약을 올렸답니다. 울고 있는 딸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동아야, 그렇지 않아. 아빠는 조금 더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 편에 있으려고 노력해. 동아야, 아빠 믿지?"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병 단식과 탄핵, 국회의원 선거, 보궐선거, 지방선거, 대선, 상임위원회 간사, 원내수석부대표로 이어지는 중간 실무당직의 무게는 딸아이와의 교감과 두터운 우정 쌓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낙선 뒤 넓은 땅을 여행 다니고 집안에서 매일 매일을 뒹굴면서 딸아이와 저는 친구처럼 가까워졌습니다. 딸아이와의 우정이 얻어지면서 제가 걸어온 길을 차분하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법정에 서다

2012년 새해를 맞아 서울 용답동, 사근동 일대를 돌며 주민들에게 설 인사를 건네며 얘기를 하고 있다. [사진=임종석 비서실장 블로그]이미지 확대
▲ 2012년 새해를 맞아 서울 용답동, 사근동 일대를 돌며 주민들에게 설 인사를 건네며 얘기를 하고 있다. [사진=임종석 비서실장 블로그]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한명숙 전 민주통합당 대표는 신임 사무총장으로 저를 임명했습니다. 원외인사였던 저를 핵심보직인 당 사무총장에 기용한 것은 파격인사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1심 유죄를 받아 출마는 포기해야 했습니다. 모 저축은행으로부터 보좌관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것이었는데 이 재판은 대법원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저와 함께 일했던 보좌관이 국가대표 운동선수인 딸을 위해 후원 받았다는 진실은 덮어졌고 정치재판이 이뤄졌습니다. 당시 그 저축은행 관계자는 검찰 조사에서 2005년부터 보좌관을 통해 저에게 매달 300만 원가량을 보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보좌관이 저에게 돈을 전달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유용했다고 판단해 저는 2014년에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2년에 걸친 재판이 드디어 끝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겪은 재판은 너무 억울한 것이었지만 역시 나중에는 좋은 교훈으로 남았습니다. 그때 떠오르신 분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분은 훨씬 더 극한 어려움을 견뎌내시고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번영, 그리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왜 정치를 하는 게 중요한 지를 다시 성찰하는 시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권으로 복귀

서울 중구 세종대로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제259회 임시회에 참석한 박원순과 임종석.[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서울 중구 세종대로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제259회 임시회에 참석한 박원순과 임종석.[사진=연합뉴스]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보수단체는 서울시가 세월호 유가족 농성을 위해 광화문광장에 천막을 설치해줬다며 박원순 서울시장과 공무원 3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2014년 8월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습니다. 저 역시 이와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돼 조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광화문광장 한데에 나와 있는 유족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시 차원에서 천막을 치고 의료와 물자를 지원하도록 지시한 뒤 박원순 시장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후 20대 총선에서 서울 은평을에 도전하기 위해 서울시 정무부시장직을 내려놨지만 공천에서 탈락해 국회 입성에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당시 저는 "야당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 있다"고 쓴소리도 했습니다. 사회·정치적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해 국가 운영 의지에는 소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50대 시절

박원순→문재인의 남자로

지난 19대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박원순 캠프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며 대표적인 '박원순의 남자'로 분류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박 시장이 경선에서 중도 사퇴했고 이후 2016년 9월께 자리를 옮겨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선거운동 캠프에 합류했습니다. 저는 박 시장 캠프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 문 후보의 비서실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 캠프 합류 제의 받았을 때 저 개인적으로 '문 후보라면 전국적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돼 한국의 정치지형을 바꿀 수 있겠다'고 봤습니다. 또 19대 대선이 정권교체라는 대의 외에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 완화를 통해 한국의 정치지형이 바뀔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文정부 초대 비서실장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11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 브리핑실에서 민정·홍보·인사 등 일부 수석비서관 인선내용을 발표하며 밝게 웃고 있다.[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11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 브리핑실에서 민정·홍보·인사 등 일부 수석비서관 인선내용을 발표하며 밝게 웃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저를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첫날인 지난 5월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1호 인사'를 직접 발표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임종석 비서실장 임명을 통해 젊은 청와대, 역동적이고 탈권위적인 청와대, 군림하지 않는 청와대를 만들 생각"이라며 "임 실장은 젊지만 당에서 쌓은 경험과 서울시에서 쌓은 행정경험을 통해 안정감을 두루 갖춘 인물"이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저 역시 문 대통령의 무조건적인 '예스맨'이 되지 않고 국민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이를 대통령에게 잘 전달하는 비서실장이 되겠다고 각오를 밝힌 바 있습니다.

[김정범 기자·윤은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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