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규의 맥] 슬로건에 나타난 대선후보들의 생각

최초입력 2017-04-18 15:44:52
최종수정 2018-04-30 17:27:34
슬로건(slogan)은 어떤 단체의 주의, 주장 따위를 간결하게 나타낸 짧은 어구다. 사회운동과 시위에서 사용하는 대중의 요구를 집약한 표현이며, 선거운동에서 정치인이나 정당이 자신의 주장을 간결하게 나타낸 표현이다. 광고나 캠페인에서도 사용된다.

슬로건은 스코틀랜드어 '슬로곤(slogorn)'의 변종이다. 스코틀랜드 문장(紋章)의 신조(信條)나 보조 신조로 사용됐다. 군인들의 코트 문장이나 방패의 보조 신조로도 사용됐다.
자기편을 결집하고 상대의 기를 꺾기 위한 '전투구호'였던 셈이다. 현대에서 전쟁은 선거다. 그래서 시대정신을 압축한 슬로건이 중요하다.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선거 슬로건은 경제 회복에 초점을 맞춘 ‘It's the economy, stupid'(바보야, 문제는 경제야)였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선거 슬로건은 미국의 변화를 강조한 'Yes, We can Change'(그래, 우리는 할 수 있다)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슬로건은 '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한번 위대하게 만들자)였다. 슬로건은 통했고 이들은 선거에서 승리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대통령선거 주요 후보들의 슬로건을 보면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다. 1987년 13대 대선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는 '보통사람'과 '이제는 안정입니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는 '군정 종식', 김대중 평민당 후보는 '대중은 김대중, 평민은 평민당'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민주화 이후 시대정신은 '민주화'였다. 노태우 후보는 민주화를 '보통사람'으로 표현했다. 김영삼 후보는 '군정 종식'으로 표현했다. 김대중 후보는 '대중은 김대중'이란 슬로건으로 자신을 부각시켰다. 유권자들은 이른바 '6·29 선언'으로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보통사람'은 6·29 선언 ‘이후'를 지향했고, '군정 종식'은 6·29 선언 '이전'을 지향했다. 유권자들은 과거지향적인 '회고'가 아닌 미래지향적인 '전망'을 선택해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는 '신한국 창조', 김대중 민주당 후보는 '이제는 바꿉시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는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을 각각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유권자들은 '신한국 창조'라는 '전망'을 선택해 김영삼 후보가 당선됐다. '이제는 바꿉시다'는 '회고적 투표'를 지향했던 것이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는 '준비된 대통령',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깨끗한 경제 튼튼한 경제'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당시 IMF경제위기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준비된 대통령'과 '든든해요 김대중,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김대중 후보의 슬로건이 국민을 안심시켰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나라다운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새로운 대한민국'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후보 노무현'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 후보의 '나라다운 나라'는 당시로서는 과녁이 정확하지 않았다. 노 후보의 '새로운 대한민국'은 개혁을 의미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이어서 '전망적 투표'를 이끌었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실천하는 경제대통령' '국민성공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경제 회복과 성공을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겨냥한 슬로건이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가족이 행복한 나라'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추상적인 슬로건으로 국민의 가슴을 흔들지 못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전면에 내걸었다. 박 후보는 '국민행복시대' '박근혜가 바꾸네' 같은 구호도 내놓았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매우 철학적인 슬로건이어서 국민의 가슴에 닿지 못했다.

그렇다면 2017년 19대 대선에서 각 당 후보들의 슬로건은 어떤가.

각 당의 대선주자들의 포스터-슬로건[사진=대선주자캠프제공]이미지 확대
▲ 각 당의 대선주자들의 포스터-슬로건[사진=대선주자캠프제공]
기호 1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슬로건은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이다. '나라를 나라답게'는 16대 대선 때 이회창 후보의 '나라다운 나라'와 유사하나 '이게 나라냐'는 촛불집회의 시대정신을 반영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확 바꾸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망적 투표'를 겨냥했다. '든든한 대통령'은 15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든든해요'와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최근 한반도 위기 국면을 맞아 국민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방점을 뒀다. 이념적으로는 중도에 가깝다.

기호 2번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슬로건은 '지키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과 '당당한 서민 대통령'이다. '지키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전통적인 보수의 이념을 표방했다. '촛불'보다 '태극기'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회고적 투표'를 겨냥한 결과를 낳았다. '당당한 서민 대통령'은 '흙수저' 출신을 부각시키기 위한 슬로건이지만 '보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서민'을 위한 보수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부담을 안았다.

기호 3번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슬로건은 '국민이 이긴다'다. '국민이 이긴다'는 16대 대선 때 노무현 후보의 '국민후보'를 연상시킨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서와 같이 결국 '국민승리'를 부각하기 위한 슬로건이다. 촛불집회에서 많이 나온 구호이기도 하다. '국민'만으로는 '전망적 투표'를 견인하기에는 약간 미흡하다. '이긴다'를 강조하기 위해 안 후보는 팔 동작을 'V'자로 뻗었다. 안랩의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인 'V3'를 연상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과녁이 불분명하다. 이념적으로는 모호하다.

기호 4번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슬로건은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보수의 새 희망'이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는 유 후보의 능력을 부각시키기 위한 슬로건이다. '경제안보전문가'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보수의 새 희망'은 '자유한국당은 낡은 보수, 바른정당이 새로운 보수'라는 점을 내세운 것으로 전망적이다. '차기'를 겨냥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슬로건 자체만으로는 이념적으로 가장 보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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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5번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슬로건은 '노동이 당당한 나라'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이다. '노동이 당당한 나라'는 정의당의 슬로건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와 같은 내용이다. 이는 유 후보의 '보수의 새 희망'과 함께 후보의 이념적 정체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내 삶을 바꾸는 대통령'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썼다. '대개혁'으로 국민의 삶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전망적이면서 이념적으로는 확실하게 진보적이다.

언어는 생각의 표현이다. 대선후보들의 슬로건을 보면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조한규 전 MBN해설위원·세계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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