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쇼] 거의 모든 정부마다 추진했던 남북정상회담

최초입력 2018-04-25 17:11:02
최종수정 2018-04-30 17:37:54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정상회담이 열린다. 문 대통령의 취임 1주년도 채 안 된 시점이다. 역대 정부 모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 탓에 성사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일까. '신이 도와줘야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상회담 불발은 모두 보수색깔의 정부에서 였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1. 1972년 공동성명 냈지만 회담 불발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은 분단 뒤 최초로 나온, 남북 교류와 통일에 관한 성명이다. 서로를 적대시하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주석)은 밀사를 통해 접촉했다. 남북은 1971년 적십자사를 통해 판문점에서 비밀 접촉을 가졌고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이후 박성철 북한 노동당 제2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당시 신문모음[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당시 신문모음[사진=국가기록원]
이 선언으로 남북조절위원회가 설립되는 등 남북 간 대화 통로가 마련됐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논의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해 남한은 10월 유신, 북한은 12월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해 통일 논의가 중단됐다. 남북 모두 내부 정치 상황을 위해 통일 논의를 이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2. 1985년 간첩선 탓 성사 직전 무산
전두환 정권 당시 남북정상회담은 성사 직전에 취소됐다. 지난해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에 따르면 남북은 1985년 7월부터 두 달간 사전 비밀회담을 세 차례 열고 특사가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이 우리 측 특사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정상회담 개최 시기가 1985년으로 돼 있었다.

1985년 6월 전두환 대통령(제12대 재임 1981.02∼1988.02)이 청와대에서 남북적십자회담대표 관계자 접견 시 악수하고있다.[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1985년 6월 전두환 대통령(제12대 재임 1981.02∼1988.02)이 청와대에서 남북적십자회담대표 관계자 접견 시 악수하고있다.[사진=국가기록원]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당시 심경에 대해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어볼 수 있었다"고 적었지만 그해 10월 북한 무장 간첩선이 부산 해안으로 침투하다 격침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내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은 것은 김일성에게 품었던 한 가닥 신뢰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박철언 전 의원 회고록에서도 1985년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비밀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밝혔지만, 무산된 이유를 밝힌 것은 전 전 대통령 회고록이 처음이다.

3. 1991년 북한군부 저항과 소극적인 중국
노태우 정권 당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대북 특사로 나서 정상회담이 추진됐다. 김 전 회장이 2014년 출간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 그 비화가 전해진다. 김 전 회장은 김일성을 만나 "(남북 화해에) 최선을 다했다는 흔적이라도 역사에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고 김일성이 이를 동의했다.

노태우대통령(13대 재임 1988.02.25~1993.02.24)이 제3차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석했던 남측 대표단을 접견하고 결과 보고를 청취하고있다.[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노태우대통령(13대 재임 1988.02.25~1993.02.24)이 제3차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석했던 남측 대표단을 접견하고 결과 보고를 청취하고있다.[사진=국가기록원]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주변국들 동의를 받아서 (정상회담) 하는 것은 절대 힘들다. 일단 터뜨려놓고 전 능력을 동원해서"라며 정상회담을 권유했다. 김 전 회장이 특사로 활동하며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내고 정상회담을 거의 성사시켜 놨지만 이 역시 회담 성사 직전에 무산됐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인터뷰 모음집 '육성 회고록'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의 여건이 덜 조성됐고 판단했고 북한이 이익을 섣부르게 요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군부와 보수세력 등의 저항을 무산 이유로 꼽기도 한다.

4. 1994년 정상회담 날짜까지 잡았지만
남북정상회담 날짜까지 정하고 성사 직전에 취소된 경우도 있다. 바로 김영삼정부 때다. 1994년 6월 경향신문은 "남북한은 6월 28일 평화의집에서 정상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을 갖고 김영삼 대통령이 오는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2박3일간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분단 이후 첫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1994년 평화의 집 남북특사교환 실무접촉8차회담 [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1994년 평화의 집 남북특사교환 실무접촉8차회담 [사진=국가기록원]
분단 49년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지만 정상회담을 17일 앞둔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역사적 만남은 무산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로 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변수였다.

5. 남북 경색 속 비밀 추진됐지만 불발
김대중·노무현정부 때는 각각 2000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다. 이후 이명박·박근혜정부 때에는 남북 관계가 사실상 단절됐다. 2008년 남한 관광객 피격 사건,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과 11월 연평도 포격 등이 벌어지면서다.

2000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사진=국가기록원,대통령기록관]이미지 확대
▲ 2000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사진=국가기록원,대통령기록관]
하지만 이 와중에도 정상회담은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다.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인 임태희 전 의원이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비밀리에 만났다. 2011년 6월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 기자와 문답하는 과정에서 우리 측이 '애걸복걸'하며 정상회담을 추진하려고 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북한 인사와 비밀 회담을 한 우리 측 참석자 실명도 공개했다.

박근혜정부 당시인 2012년 개성공단 중단과 연이은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남북정상회담 공식 논의는 없었다. 2015년 정상회담을 추진하고자 당시 친박 의원이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접촉했다는 내용이 전해졌지만 정상회담까지 이뤄지지는 못했다.

[김수형 기자]

[ⓒ 매경미디어그룹,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