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쇼] 판문점, 희로애락 65년 역사…정전협정에서 종전거론까지

최초입력 2018-05-02 16:31:29
최종수정 2018-05-02 16:52:57
판문점(板門店)의 옛지명은 널문리다. 널문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을 가며 임진강을 건너야 했는데, 백성들이 널빤지로 다리 혹은 배를 만들어 피난을 도왔다는 것에서 유례했다.

1953년 판문점 회담장 지역 전경[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1953년 판문점 회담장 지역 전경[사진=국가기록원]
한국전쟁 휴전회담은 당초 개성에서 진행됐지만 유엔의 제안으로 개성에서 10km 떨어진 널문리에서 천막을 치고 했고, 널문리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판문'이 됐고, 당시 이곳에 조그만 주점이 있어 '점'을 붙여 '판문점'이 됐다. 분단의 상징인 만큼 이 곳, 희로애락의 역사를 갖고 있다.



1. 희(喜)…평화의 상징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에서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김재훈기자]이미지 확대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에서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김재훈기자]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뒤였다. 판문점 선언에는 "남과 북은 정전협정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양 정상이 서명했다.

문 대통령에 이어 발표한 김 위원장은 "오늘 내가 다녀간 이 길로 북과 남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가슴 아픈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된다면"이라고 말하며 판문점을 언급했다. 정전협정을 체결한 판문점에서 65년 만에 종전을 거론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30일 트위터에서 미북 정상회담 장소와 관련해 "(판문점 내) 평화의 집/자유의 집이 제3국보다 더 대표성을 띠고 중요하며 지속가능한 장소일까"라고 밝혔다.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 합의 등 보다 진전된 합의가 나올 경우 판문점은 그야말로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2. 노(怒)… 도끼만행·총격

1975년 9월 30일 판문점의 남북 경비병[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1975년 9월 30일 판문점의 남북 경비병[사진=국가기록원]
판문점하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측과 북측 군인이 반듯하게 서 있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1976년 이전만 해도 군사분계선은 없었다. 1976년 도끼만행사건 이전만 해도 판문점은 남측과 북측 군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이 벌어졌다. 발단은 15m의 미루나무였다. 지금은 사라진 제3초소는 인근에 북한군 초소 3개에 둘러 싸여 있었다. 그리고 제3초소 주변에는 15m의 미루나무가 있었다. 연합사 미군은 제5관측소에서 북한 초소에 둘러 싸여 있는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감시했다. 여름이면 미루나무에 가려 3초소가 보이지 않자 미군 장교 2명과 경비병력 10명과 노무자 5명은 미루나무의 가지치기 작업을 했다. 그러자 북한군이 내려와 이를 제지했고 결국 북한군이 도끼로 미군 장교 2명을 내리쳐 사망케 했다. 한국군 장교 1명 등 9명도 부상을 입었다.

1976년 북괴군의 8.18 판문점 도끼만행으로 피살된 미군장교 유해(2구)의 본국 송환식[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1976년 북괴군의 8.18 판문점 도끼만행으로 피살된 미군장교 유해(2구)의 본국 송환식[사진=국가기록원]
즉각 주한미군 전투태세 강화, 오키나와 미군 전투기 한국 재배치 등이 이뤄졌고 북한 역시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달했다. 미루나무는 이후 유엔사에 의해 잘려나갔다.

지난해 11월 북한군인 오청성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내려왔고 귀순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3. 애(哀)…정전협정 체결

1950년 12월부터 타진되는 정전이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됐다. 개성은 당시 북한 점령지역이었는데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개성을 고집했다. 그해 10월, 유엔의 요구에 따라 휴전회담은 판문점에서 진행돼 판문점 역사가 시작됐다. 결국 2년 넘게 700여 차례 회담이 열린 끝에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왼)한국전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오) 휴전협정 조인문[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왼)한국전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오) 휴전협정 조인문[사진=국가기록원]
정전협정의 공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당시 UN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웨인 클라크, 북한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서명했고 당사국인 한국 대표의 서명은 없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을 주장하며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



4. 락(樂)…포로교환·남북접촉

판문점은 정전협정이라는 아픔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남북 화해의 기대가 서린 장소였다. 정전협정 뒤 남북간의 일은 판문점에서 이뤄졌다. 일단 포로교환이다. 남과 북은 판문점에서 양측간의 포로를 교환했다.

1971년 10월 27일 제6차 남북간 이산가족 찾기 예비회담 [사진=국가기록원]이미지 확대
▲ 1971년 10월 27일 제6차 남북간 이산가족 찾기 예비회담 [사진=국가기록원]
정전이 계속되면서 이산가족문제가 불거지면서 1971년 8월 남북적십자 파견원 제1차 접촉을 시작으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25차례 판문점에서 열렸다. 당시 가족까지 포함해 이산가족은 1000만 명이 훨씬 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15선언' 이후 이듬해 북한에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고, 이후 남북적식자회담 연락사무소가 판문점에 설치됐고, 남북간 최초의 직통 전화도 설치됐다.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은 결국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1979년에는 평양에서 열린 제35회 탁구 세계선수권대회 참가 논의를 위해 판문점에서 남북탁구협회 회의, 84년에는 LA올림픽 단일팀 구성 관련 남북체육회담 등 스포츠 교류를 위한 회담도 열렸다.

[김수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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