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쇼] 북한 비핵화, 반복된 합의와 파기 역사

최초입력 2018-03-08 14:33:13
최종수정 2018-03-09 14:04:18
북한이 비핵화를 거론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특사단 수석대표로 1박2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온 뒤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으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 변함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북한은 1965년 핵 개발을 추진한 뒤 국제사회의 압박이 있을 때는 핵 합의를 해왔다. 반면 핵 실험을 통해 핵 합의를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미국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 댄 코츠 국장은 북한이 비핵화 대화 의지를 표명한 데 대해 회의적이라고 밝히면서 "과거의 모든 노력은 실패했고, 단지 북한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줬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근본적으로 불신에 기인한다"며 "합의 이후 이행 과정에서 서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부분, 합의문의 해석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비핵화에 대한 합의와 파기가 반복됐다고 말했다. 북한 비핵화 합의와 파기의 반복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1. 일촉즉발 위기 거쳐 '제네바 합의'

북한은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지만 1993년 3월 돌연 탈퇴를 선언한다. NPT는 핵을 보유하지 않은 나라가 새로 핵무기를 갖는 것과 보유국이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제공하는 것을 동시에 금지하는 조약이다. 게다가 1994년 6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해 국제사회에 북핵 위기가 고조됐다.

당시 북한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도 나온 터라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는 극에 달했고, 1994년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을 직접 공격하고자 항공모함 5척을 동해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에 전쟁 우려를 전달해 전쟁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10월 미국은 북한 핵 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뤄내며 일단락됐다.



2. 몰래 그리고 늦게…北 제네바 합의 파기

북한 조선중앙TV가 23일 방영한 새 기록영화 "어머니당의 품" 제5부에서 강석주 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서명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북한 조선중앙TV가 23일 방영한 새 기록영화 "어머니당의 품" 제5부에서 강석주 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시 서명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1994년 제네바 합의 뒤에도 북한은 합의를 어기고 계속해서 핵 개발을 추구했다. 특히 파키스탄 등지에서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를 비롯한 각종 장비를 몰래 들여오기도 했다.

미국 내부적인 문제도 제네바 합의를 지속시키지 못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가 합의한 경수로 건설 지원 등을 두고 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거부해 미국의 약속 이행이 늦어지면서 북한은 다시 원자로를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8년 8월에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쏘아 올렸다. 그런 와중에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가 싶었지만 2002년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을 시인하면서 제2차 북핵 위기가 불거졌다. 북한은 200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



3. 9·19 공동성명…1차 핵실험으로 파기

2005년 9월 19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북핵 6자회담에서 6개국 대표들이 한반도 비핵화 원칙 등 6개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한 뒤 손을 맞잡고 축하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2005년 9월 19일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북핵 6자회담에서 6개국 대표들이 한반도 비핵화 원칙 등 6개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한 뒤 손을 맞잡고 축하하는 모습[사진=연합뉴스]
국제사회는 2003년 3월 북·중·미 3자 회담을 시작으로 8월에 한국과 일본, 러시아 등 6개국이 참여하는 6자회담이 개최됐다. 그리고 네 차례의 6자회담 끝에 2005년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그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내용의 '9·19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6자회담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임을 재확인'이라는 주 내용의 합의안에는 북한에 중유 제공, 대북 송전 무상 제공, 경수로 무상 제공 등의 지원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1년 뒤인 2006년 7월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맞춰 북한은 대포동 2호를 발사했고 그해 10월에는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하며 9·19 공동성명을 파기했다.



4. 원자로 폭파했지만…2차 핵실험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과시하기 우해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 폭파 장면.[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
▲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과시하기 우해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 폭파 장면.[사진=연합뉴스]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압박을 함과 동시에 협상도 계속해 2007년에는 9·19 공동성명의 구체적인 이행계획서인 '2·13 합의'와 '10·3 합의'를 마련했다. 여기에는 북한에 대한 에너지 공급 재개 등이 포함돼 있다. 북한도 이에 화답했다. 2008년 북핵 문제의 상징인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전시성 행사를 벌이면서 국제사회를 조금이나마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1년짜리에 불과했다. 2009년 4월 장거리미사일을 시험발사한 데 이어 5월에는 제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당시 조선중앙TV는 "공화국의 자위적 핵 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주체 98년 5월 25일 또 한 차례의 지하 핵시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고 보도했다.



5. 2·29 합의 위반…제재 속 핵무력 완성 선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 사망한 뒤 김정은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김정은 집권 직후인 2012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북·미 회담에서 '미국의 대북 지원의 대가로 북한은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우라늄 농축 활동을 중단한다'는 내용의 '2·29 합의'를 이뤄냈다. 미국의 대북 지원에는 식량 지원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 합의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은 두 달 뒤인 4월 장거리로켓인 '은하 3호'를 발사했지만 서해상에 추락해 실패했다. 북한은 로켓 안에 '광명성 3호'인 인공위성이 탑재돼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국제사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위반이라며 대북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 국무부는 당시 "2·29 합의는 북 위성 발사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뒤 2012년 '2·29 합의'가 이뤄졌지만 사실상 선대에서 준비한 것이다.

김정은은 집권 뒤 핵과 경제병진 노선을 걸며 국제사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대륙간탄도미사일인 '화성-15형'을 발사한 직후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김수형 기자]

[ⓒ 매경미디어그룹,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